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레드릭 타운센드 워드 (문단 편집) == 양창대 == 그렇게 도무지 청병만으로 상해의 방어를 장담할 수 없던 상해에 서양인 용병대가 만들어졌으나, 그 실상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인력은 제명된 [[선원]], [[탈영병]], [[노숙자]], 뜨내기, [[실업자]] 등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서양 열강의 지원도 예상만큼 크지 않았는데, 청나라 조정은 태평천국에 대항하기 위해 지나치게 서양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고, 서양 열강 또한 만약 상해가 태평천국에 함락될 경우 중립을 지키지 않은 댓가로 열강의 이권이 손상될 것을 우려했다. 이렇게 시작부터 삐걱거렸지만 워드는 무기와 인력을 어떻게든 준비시켜 1860년 6월 100여명의 용병단을 육성하지만, 질이 낮은 인력을 훈련시킬 시간도 없이 상해 측의 조급한 요구로 전투에 참전해야 했다. 첫 전투는 송강(松江) 전투였다. 양창대는 포격 지원조차 없이 태평군이 철저하게 방어하던 송강을 공격해야 했고, 역시 참패하여 상해로 돌아가야 했다. 워드는 [[필리핀인|마닐라인]]을 주축으로 한 추가 인력과 대포 여러 문을 구입해 7월 중순 다시 송강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러나 양창대 또한 250명의 병력 중 62명이 전사하고 워드를 포함한 100여 명이 부상당했다[* 사상자가 병력의 2/3에 가까운 수준으로, 시시때때로 병력 충원이 가능했던 시대적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말 그대로 전멸했을 인명 피해다.]. 그러나 이렇게 큰 피해를 입은 뒤에도 워드는 높은 봉급을 제시하며 어떻게든 부족한 머릿수를 채우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양창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괴멸적인 패배를 당하고 만다. 1860년 8월 2일 양창대는 상해를 향한 길목인 청포(靑浦)에 위치한 태평군의 진지를 격퇴하라는 명령을 받고 청포로 출동하였다. 그러나 인근에 매복한 태평군의 기습 공격으로 양창대는 10'''분'''--10시간이 아니다--도 되지 않아 절반을 손실했고 워드 자신도 총탄에 왼쪽 턱부터 오른쪽 뺨까지를 뚫리는 중상을 입었으며, 양창대는 겨우 후퇴할 수 있었다. 워드는 이 부상으로 인해 하관이 기울어지고 [[언어장애]]까지 생기게 되었다. 워드는 부대를 버리고 전력 보충을 위해 상해로 이탈했고 양창대는 부대장인 [[헨리 안드레스 버제빈]]의 지휘 아래 송강에 주둔하며 어떠한 전투도 치르지 않았다. 상해로 돌아간 워드는 아예 중국으로 [[귀화]]하기 위해 중국인과 결혼한 것으로 서류를 위장하고 이것을 이용해 여러 가지 문제[* 상해에 주둔한 미군 병사들이 높은 봉급에 혹해서 탈영한 뒤 양창대에 입대한 일이 대표적이었다.]로 인한 미국 총영사관의 기소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상해에 주둔했던 영국 해군 제독 제임스 호프는 양창대에 영국인 병사들이 탈영 후 가입하는 상황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워드를 영국 군함에 감금하였다. 그러나 워드는 한밤중에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군함을 탈출하여 다시 양창대에 합류했다. 해를 념겨 1861년 5월, 워드는 다시 청포를 공격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양창대는 참패하고 많은 손실을 입었으며, 워드는 양창대를 효과적으로 재조직하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